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 분류
- Paintings
- 지역
- 서양
- 라이선스
-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돌아온 탕자 는 렘브란트의 유화 작품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시 박물관 소장품이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로, 1668년 그가 사망하기 2년 이내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성경의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순간을 묘사한 작품으로,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원작을 본 사람이라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림이라고 주장해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평한 유명한 작품이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의 어두운 구석, 한 남자가 누군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있어요. 머리는 아버지의 가슴 쪽으로 파묻혀 있고, 발바닥은 해어진 신발 밑창을 드러내고 있어요. 오랜 방랑과 탕진 끝에 돌아온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를 감싸는 아버지의 두 손이 묘하게 달라요. 왼손은 크고 단단하게 아들의 어깨를 짚고, 오른손은 부드럽고 여린 몸짓으로 등을 어루만지고 있어요. 렘브란트는 이 한 쌍의 손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감촉을 동시에 담았습니다. 설명 없이, 그 손짓만으로 이미 용서가 완료되어 있어요.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안에 완성한 작품이에요. 평생 탕진과 빈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겪은 화가가 누구보다 깊이 이 비유를 이해했을 거예요. 미술사학자 H. W. 얀손은 이 그림을 두고 '침묵 속의 영원한 순간'이라 불렀어요.
화면 오른편에는 팔짱을 낀 형이 서 있어요.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방탕한 동생의 귀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판단의 시선도 그림 안에 있어요. 네덜란드 사제 헨리 나우웬은 이 그림 앞에서 오래 머물며, 집에 있던 아들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고 썼어요.
용서를 그린 그림이지만, 더 어려운 건 돌아온 사람이 아니라 기다려온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 — 그 무게까지 렘브란트의 붓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 두 손 — 무릎 꿇은 아들의 등에 가만히 얹힌 아버지의 두 손을 먼저 보세요. 한 손은 더 넓고 단단하게, 다른 손은 가늘고 부드럽게 그려져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자애가 한 몸짓에 포개져요.
- 빛 — 화면 전체가 어둠에 잠겼는데, 아버지의 붉은 망토와 두 사람의 얼굴, 아들의 누런 옷자락만 빛으로 떠오릅니다. 빛이 오직 용서의 순간만 비추고 있어요.
- 발치 — 아버지 품에 머리를 묻은 아들의 닳아 벗겨진 신발 한 짝과 드러난 맨발을 살펴보세요. 그가 걸어온 고된 밑바닥의 길이 그 작은 디테일에 담겨 있어요.
- 곁의 시선 — 오른쪽에 붉은 옷을 걸치고 지팡이를 짚은 채 두 손을 맞잡고 선 인물이 큰아들로 보여요. 따뜻한 포옹과 달리 그의 표정은 굳어 있어, 용서를 지켜보는 또 다른 마음을 비춥니다.
이 침묵의 순간, 어둠 속 인물들 가운데 당신의 눈은 어디에 가장 오래 머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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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끝자락에 남긴 고백
이 그림 앞에 서면 많은 이들이 한동안 말을 잃는다고 해요. 렘브란트가 1669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러니까 그의 마지막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돌아온 탕자》입니다. 성경 누가복음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아 흥청망청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작은아들을, 아버지가 조용히 끌어안는 바로 그 순간을 담았어요. 아들은 회개하며 무릎을 꿇은 채 종으로라도 받아 달라 빌고, 아버지는 그를 잃었다 되찾은 자식으로 맞아들입니다.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시 미술관에서 이 원작을 본 사람이라면 '이제껏 그려진 가장 위대한 그림'이라 불러도 용서받을 만하다고 했을 정도예요. 렘브란트는 이 탕자 비유에 평생 마음을 빼앗겨, 1636년 동판화를 시작으로 수십 년에 걸쳐 여러 점의 드로잉과 판화, 그림을 남겼답니다.
두 손에 담긴 아버지의 사랑
이 작품에서 가장 오래 머물게 되는 곳은 아들의 어깨에 얹힌 아버지의 두 손이에요. 자세히 보면 왼손은 더 크고 단단한 남성의 손처럼, 오른손은 더 부드럽고 받아 안는 듯한 손길로 그려져 있습니다. 한 사람의 두 손에 아버지의 엄격함과 어머니의 자애가 동시에 담겨, 용서라는 것이 어느 한쪽 사랑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음을 말하는 듯해요. 무릎 꿇은 아들의 닳아 해진 신발, 빡빡 깎인 머리, 남루한 옷자락은 그가 얼마나 밑바닥까지 떨어졌는지를 조용히 증언합니다. 그 비참함을 감싸 안는 아버지의 손이 있어, 화면 전체가 어둠 속에서 따스함으로 빛난답니다.
침묵 속에 멈춘 영원
오른쪽에는 큰아들로 보이는 인물이 두 손을 맞잡은 채 다소 굳은 표정으로 서 있어요. 비유 속에서 그는 "창녀들과 재산을 탕진한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는 아버지에게 서운함을 토로하지요. 이 외에도 왼쪽 위 어렴풋한 여인은 어머니로, 앉아 있는 부유한 차림의 남자는 집안의 조언자나 세리로 추정되지만, 그 정체는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어 왔습니다. 미술사학자 H. W. 잰슨은 이 그림을 렘브란트의 '가장 고요한 작품, 영원으로 늘어나는 한순간'이라 표현했어요. 사제이자 작가였던 헨리 나우엔은 1986년 에르미타시에서 이 그림 앞에 홀로 몇 시간을 머문 경험을 바탕으로 한 권의 책을 쓰기도 했답니다. 그는 렘브란트가 방탕한 작은아들이자 집을 지킨 큰아들이기도 했으며, 둘 다 결국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야 했다고 적었어요.
관람 포인트
먼저 아버지의 두 손에 시선을 오래 두어 보세요. 왼손과 오른손의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시면, 이 그림이 왜 그토록 깊은 위로로 다가오는지 알게 되실 거예요. 그다음 아버지 품에 얼굴을 묻은 아들의 닳은 신발 한 짝과 맨발을 살펴보세요. 그가 걸어온 고된 길이 그 작은 디테일에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화면을 가만히 멀리서 바라보며, 짙은 어둠 속에서 아버지의 붉은 망토와 두 사람의 얼굴만이 빛으로 떠오르는 구도를 느껴 보세요. 곁의 인물들이 어둠에 잠긴 사이, 빛은 오직 용서의 순간만을 비추고 있답니다.

낮 풍경인데 '야경'이라 불리고, 벽에 안 맞는다고 잘려 나간 그림의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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