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초상
작가 미상
- 제작 시기
- 조선 효종 2년(1651)
- 문화권
- Korean
- 지역
- 동아시아
- 라이선스
- 국가유산청 (공공누리)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의 초상화이다. 송시열 선생은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평생 주자학연구에 몰두하여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의 주류였다. 그는 논리적이고 힘있는 문장과 서예로도 평판이 높았다. 이 초상화는 세로 89.7cm, 가로 67.6cm로 비단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반신상이다. 머리에는 검은색 건을 쓰고 유학자들이 평상시에 입는 옷인 창의를 걸치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과장되게 표현된 거구의 몸체와 개성적인 눈썹 그리고 깊게 패인 광대뼈의 주름에서는 학식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얼굴은 엷게 채색한 다음 갈색 선으로 주름을 그렸고 옷의 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이 초상화의 오른쪽 위에는 송시열이 1651년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지은 글이 해서체로 쓰여 있으며, 중앙 위쪽에는 숙종이 1707년 정몽주의 초상화에 헌정한 어제시가 예서체로 쓰여 있는데 ‘정묘조’라는 기록이 함께 보인다. 그러나 위의 두 기록은 화면 위에 기록된 시기가 확실하지 않고, 서로 시차도 있어서 이 작품의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간결한 옷주름의 표현, 얼굴과 복식에 음영이 사용되지 않은 점 등 17세기 초상화의 특징이 보이므로 17세기로 제작시기를 특정하기도 하지만, 후자의 기록을 근거로 17세기 초상화를 잘 모사한 18세기 후기 이후의 이모본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송시열이 죽은 뒤 그를 받들고 추모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국 각지에 많은 영당과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곳에 봉안하기 위해 많은 이모본들이 제작되었고 그 가운데 다수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초상화는 그 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대표작으로 조선시대 유학자 초상의 면모와 특징을 대변하고 있다.
이 초상화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우암 송시열의 모습을 담은 반신상이에요. 송시열은 평생 주자학 연구에 몰두해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의 주류였고, 논리적이고 힘 있는 문장과 서예로도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지요.
비단 바탕에 채색한 이 그림 속에서, 그는 검은 건을 쓰고 유학자의 평상복인 창의를 걸친 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어요. 과장되게 표현된 거구의 몸체와 개성 있는 눈썹, 깊게 팬 광대뼈의 주름에서 학식의 깊이가 묵직하게 전해집니다. 오른쪽 위에는 송시열이 자신의 초상을 보고 지은 글이, 위쪽에는 숙종의 어제시가 적혀 있어요.
송시열이 세상을 떠난 뒤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전국 곳곳에 영당과 서원을 세우면서 많은 초상화가 옮겨 그려졌는데, 이 작품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손꼽히는 대표작이에요. 조선시대 유학자 초상의 면모와 특징을 잘 대변하는 그림입니다.
- 흰 옷의 무게 — 넓게 펼쳐진 새하얀 창의가 화면을 가득 채워, 검은 건과 검은 옷깃이 더욱 또렷한 대비를 이뤄요.
- 긴 수염 — 가슴까지 드리운 흰 수염이 노학자의 풍모를 묵직하게 전합니다. 평생 학문에 몰두한 거유의 얼굴이지요.
- 주름의 선 — 얼굴은 엷게 칠한 뒤 갈색 선으로 광대뼈의 깊은 주름을 잡았고,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간결하게 그렸어요.
- 비낀 시선 — 정면이 아니라 살짝 옆을 바라보는 얼굴에서, 음영 없이도 강직한 기품이 배어 나와요.
- 곁들인 글 — 화면 위쪽 글씨는 송시열 자신이 초상을 보고 지은 글과 숙종의 어제시예요. 인물과 글이 함께 한 사람을 증언하지요.
이 거구의 학자에게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위엄일까요, 고집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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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파의 거유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입니다. 평생 주자학 연구에 몰두해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고, 논리적이고 힘 있는 문장과 서예로도 이름이 높았어요. 이 초상화는 그런 대학자의 풍모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합니다.
거구의 몸과 깊은 주름
세로 89.7센티미터, 가로 67.6센티미터의 비단에 그린 반신상으로, 검은 건을 쓰고 유학자의 평상복인 창의를 걸친 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어요. 과장되게 표현된 큰 몸체와 개성적인 눈썹, 깊게 팬 광대뼈의 주름에서 학식의 깊이가 묻어납니다. 얼굴은 엷게 칠한 뒤 갈색 선으로 주름을 그렸고,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간결하게 처리했어요.
이모본의 시대
화면 오른쪽 위에는 송시열이 1651년 자신의 초상을 보고 지은 글이, 가운데 위에는 숙종의 어제시가 적혀 있습니다. 다만 두 글이 적힌 시기가 분명치 않고 서로 시차도 있어, 제작 시기를 두고는 의견이 갈려요. 간결한 옷주름과 음영을 쓰지 않은 표현을 근거로 17세기로 보기도 하고, 17세기 초상을 잘 모사한 18세기 후기 이후의 이모본으로 보기도 합니다.
관람 포인트
송시열이 세상을 떠난 뒤 그를 추모하는 영당과 서원이 전국에 세워졌고, 그곳에 봉안하기 위한 이모본이 수없이 만들어졌어요. 이 초상은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대표작으로, 조선시대 유학자 초상이 지닌 위엄과 특징을 한눈에 보여 줍니다.

조선이 사랑한 한 여인의 자태, 옷고름 매만지는 손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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