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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

Guernica

파블로 피카소

분류
Paintings
지역
서양
라이선스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작품 소개

〈게르니카〉(스페인어: Guernica)는 최종국면 당시 독일군이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 일대를 1937년 4월 26일 24대의 비행기로 폭격하는 참상을 신문으로 보고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그림이다. 나치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며 250~1,600명 그 이상의 사람들(대부분 민간인)이 사망하였고 또 부상 당하였다.

도슨트 이야기

1937년 4월 26일 월요일,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에 폭탄이 쏟아졌습니다. 독일 콘도르 군단의 항공기들이 약 두 시간 동안 마을 상공을 맴돌며 폭격을 이어갔어요. 그날은 장이 서는 날이었고, 남자들 대부분은 전선에 나가 있었습니다. 마을 한가운데는 여성과 아이들로 가득했어요.

파리에 살던 피카소는 신문 기사를 통해 이 소식을 접했습니다. 4월 28일 런던 '더 타임스'와 '뉴욕 타임스'에 동시 게재된 목격자 증언을 읽고, 처음 작업하던 스튜디오 주제를 던져 버렸어요. 35일 뒤인 6월 4일, 가로 7.76미터짜리 거대한 캔버스가 완성됐습니다. 흑백과 회색으로만 채워진 화면엔 울부짖는 여인, 죽은 아기, 쓰러지는 말, 찢겨진 병사가 가득했어요.

완성된 그림은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처음 걸렸습니다. 하지만 반응은 엇갈렸어요. 일부 스페인 관료들은 현대적 양식을 탓하며 다른 그림으로 교체하자고 했고, 일부 마르크스 그룹은 정치적 비전이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피카소는 작품을 팔지 않고 스페인 민주화가 실현될 때까지 뉴욕 현대미술관에 보관을 맡겼어요.

독일 점령기의 파리에서 피카소의 아파트를 찾은 독일 장교가 게르니카 사진을 보며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걸 당신이 그렸소?' 피카소가 답했다고 해요. '아니오, 당신들이 그린 거요.' 프란코는 1973년에, 프란코보다 열 살 어렸던 피카소는 그보다 앞서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981년 스페인은 민주주의 헌법을 가진 나라가 됐고, 게르니카는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어요.

이렇게 보세요
  • 무채색색이 하나도 없어요. 흑백 보도사진처럼, 1937년 게르니카 폭격의 참상을 '뉴스'처럼 들이밀죠.
  • 절규하는 말화면 한가운데, 창에 찔린 말이 비명을 질러요. 벌어진 입과 뾰족한 혀가 그림 전체의 비명을 대신하죠.
  • 전구의 눈위쪽엔 전구를 품은 눈 모양 빛. 폭탄을 닮은 그 빛 아래, 오른쪽에선 한 여인이 등불을 내밀어 진실을 비춰요.
  • 어머니왼쪽 끝, 죽은 아이를 안고 고개를 젖힌 어머니. 그 곁의 황소는 무심한 듯 정면을 바라보죠.
  • 부러진 칼바닥에 쓰러진 전사의 손엔 부러진 칼, 그 곁에 작은 꽃 한 송이 — 폐허 속 희미한 희망이에요.

색을 다 걷어낸 이 그림이, 오히려 컬러보다 더 아프게 느껴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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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 사흘 뒤, 붓을 들다

1937년 1월, 파리에 살던 피카소는 스페인 공화국 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걸 대형 작품을 의뢰받았어요. 처음엔 화실을 주제로 한 평범한 스케치를 그리고 있었지요. 그러다 4월 26일, 스페인 북부 바스크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가 나치 독일의 콘도르 군단과 이탈리아 공군에 의해 두세 시간 동안 폭격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장날이라 마을엔 주로 여자와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기자 조지 스티어의 참혹한 목격담이 《타임스》와 《뉴욕타임스》에 실려 세계로 퍼졌고, 피카소는 기존 구상을 버리고 5월 1일부터 《게르니카》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요.

흑백으로 그린 비명

높이 3.49m, 너비 7.76m의 거대한 화면을 피카소는 오직 회색·검정·흰색으로만 채웠어요. 광택이 거의 없도록 특별히 주문한 무광 페인트를 써서, 마치 신문 사진처럼 즉각적인 흑백의 충격을 노렸지요. 곁에서 작업을 사진으로 기록한 연인 도라 마르는, 피카소의 요청으로 죽어 가는 말의 일부를 직접 칠하기도 했어요. 그녀는 35일에 걸친 작업의 모든 단계를 사진에 담았고, 그 흑백 사진들이 그림에서 색을 덜어내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해요.

화면엔 창에 찔린 말, 부릅뜬 황소, 죽은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어머니, 부러진 칼을 쥔 채 토막 난 병사가 뒤엉켜 있어요. 칼에서는 한 송이 꽃이 피어나고, 위에는 눈처럼 생긴 백열전구가 차갑게 빛나지요. 사람들의 혀는 비명을 지르는 단검으로 바뀌어 있고요.

무엇을 뜻하는가

사람들은 끊임없이 물었어요. 저 황소와 말은 무엇을 상징하느냐고. 하지만 피카소는 의미를 못 박길 거부했지요. "이 황소는 황소고, 이 말은 말이다. (…) 나는 그림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했으니까요. 특정한 장면을 콕 집어 그리지 않았기에, 오히려 이 그림의 호소는 시대를 넘어 보편적인 반전(反戰)의 외침이 되었어요. 작품은 완성된 뒤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스페인 난민을 위한 모금에 쓰였고, 점점 더 강력한 평화의 상징이 되어 갔지요.

자유를 얻을 때까지

피카소는 독일 점령기에도 파리에 머물렀는데, 한 독일 장교가 《게르니카》 사진을 보며 "당신이 이걸 했소?" 묻자 "아니요, 당신들이 했지요"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져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돌아오기 전까지 이 그림을 조국에 보내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작품은 오랫동안 뉴욕 현대미술관이 보관했고, 프랑코가 죽고 스페인이 민주화된 뒤인 1981년에야 마드리드로 돌아왔지요. 지금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있습니다. 유엔 본부에 걸린 복제 태피스트리는, 2003년 이라크전을 주장하던 회견을 앞두고 가려지기도 했어요 — 전쟁을 말하는 자리에 두기엔 너무 강한 그림이었던 거예요.

관람 포인트

색이 없다는 사실에 먼저 주목해 보세요 — 그 흑백이 오히려 비명을 더 또렷하게 만들어요. 부러진 칼 끝의 작은 꽃 한 송이,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전구의 눈을 찾아보세요. 가까이서 보면 죽은 병사의 손바닥에 성흔 같은 자국이, 말의 콧등 언저리엔 해골 형상이 숨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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