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오스섬의 학살
The Massacre at Ch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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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오스섬의 학살》(The Massacre at Chios, Scènes des massacres de Scio) 또는 《키오스섬의 학살》은 1824년 외젠 들라크루아가 제작한 그림이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품은 발표 당시에, 히오스섬의 학살이 아니고 회화의 학살이라고까지 욕설을 받았으나, 그 당시의 냉정하고 아름답게 묘사하던 회화의 상식을 타파하고 낭만주의 발전에 하나의 애폭을 긋고 있다.
1822년 4월, 오스만 군대가 에게해 섬 히오스를 공격했어요. 수개월에 걸친 전투로 시민 2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7만 명은 거의 전원이 노예로 끌려갔어요. 들라크루아가 이 사건을 그리기로 결심한 건 이듬해인 1823년 5월이었어요.
1824년 살롱 개막일, 4미터가 넘는 이 그림이 앵그르의 작품과 같은 방에 내걸렸어요. 두 그림이 서 있는 순간, 비평가들은 이 전시를 두 거장의 공개 대결로 읽었어요. 앵그르는 이 그림을 '현대 미술의 열기와 간질'이라 불렀고, 그로는 '회화의 학살'이라 했어요. 그러나 비평가 티에르는 달랐어요 — 프랑스 국가는 6000프랑에 이 그림을 구입했어요.
화면에는 열세 명의 민간인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어요. 왼쪽 인물 군은 부상자와 죽어 가는 자들로 이루어졌고, 오른쪽에는 말에 묶인 채 끌려가는 여인과 그 위에 솟은 오스만 병사가 강렬한 대각선을 이뤄요. 발치에는 젖먹이가 이미 숨진 어머니의 주먹 쥔 손에서 위안을 구하고 있죠. 영웅도 없고, 구원의 빛도 없어요. 배경은 연기와 불에 그을린 마을이에요.
들라크루아는 이 그림을 완성하기 전 영국 화가 컨스터블의 풍경화를 파리에서 보고, 빛과 색채를 다루는 방식에 깊이 감화받았다고 해요. 그의 캔버스에 담긴 명암과 의상의 화려한 색채는 그 영향의 흔적이기도 해요.
오늘날 이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어요. '회화의 학살'이라는 악평 속에 태어났지만, 그 그림은 오히려 낭만주의의 새 지평을 연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어요.
- 두 무리 — 앞줄 인물들이 두 덩어리로 갈려요. 왼쪽은 무릎에 기댄 채 늘어진 사람들, 오른쪽은 곤두선 말과 그 위 군인까지 솟구치는 무리지요.
- 곤두선 말 — 오른쪽 짙은 말이 앞발을 치켜들며 화면을 위로 찢어 올려요. 그 등에 묶여 끌려가는 헐벗은 여인의 비틀린 몸이 가장 격렬한 대목이랍니다.
- 발치의 모자 — 말 발 아래를 보세요. 쓰러진 여인의 가슴에 매달린 벌거벗은 아기가, 이미 숨이 끊긴 어미의 품을 더듬고 있어요.
- 살빛의 대비 — 왼쪽에 비스듬히 누인 청년의 핏기 도는 살결과, 차분히 칠한 오른쪽 누드의 명암이 일부러 다르게 칠해졌어요.
- 물러나는 폐허 — 뒤로 멀리 바다와 불타는 마을, 연기가 끝없이 열려 나가요. 중심을 잃은 황량함이 인물들의 절망을 받쳐 주지요.
이 사람들 중에서, 당신의 시선은 누구의 얼굴에 가장 오래 머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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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청년이 건 승부수
4미터가 넘는 이 거대한 화폭 앞에 서면, 먼저 들라크루아라는 청년의 야심을 떠올리게 돼요. 1821년, 아직 공개 전시할 그림 한 점 없던 무명의 그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어요. 오스만 제국과 그리스의 전쟁을 소재로 그림을 그려 살롱에 걸고, 그것으로 이름을 떨치고 싶다고요. 마침 그가 첫 작품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선보이던 1822년 봄, 히오스섬에서는 끔찍한 학살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지요. 1823년, 들라크루아는 마침내 그 학살을 그리기로 결심했어요.
1822년 4월, 오스만 군대가 에게해 북부의 히오스섬을 덮쳤어요. 그 여름까지 이어진 공격으로 2만 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7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은 거의 모두 노예로 끌려갔지요. 들라크루아는 이 비극을, 영웅도 구원의 희망도 없이 그대로 그려 냈어요. 보통 이런 재난을 그릴 때면 짓밟힌 희생자들과 균형을 이룰 영웅적 인물을 한 명쯤 세우기 마련인데, 이 그림에는 그런 인물이 없어요. 폐허와 절망만이 가득하지요. 바로 그 점이 발표 당시부터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왔답니다.
두 개의 인간 피라미드
화면 앞쪽에는 열세 명의 민간인이 학살과 노예살이를 앞두고 떼지어 모여 있어요. 들라크루아는 이들을 거의 평면에 가깝게, 축 늘어지고 흐트러진 채로 들이밀어요. 그 배치는 크게 두 개의 인간 피라미드로 나뉘지요. 왼쪽 피라미드는 붉은 페즈를 쓴 남자에서, 오른쪽 피라미드는 말 탄 군인에서 정점을 이뤄요. 사실 이 피라미드 구도는 들라크루아가 깊이 감명받았던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에서 온 것이에요. 흥미롭게도 그 자신이 《뗏목》에서 팔을 뻗은 앞쪽 청년의 모델을 서기도 했답니다.
두 피라미드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요. 왼쪽은 체념과 무기력으로 가라앉아 있어요. 앞쪽 남자는 거의 숨이 끊어질 듯하고, 그 위의 남자는 자기를 지킬 힘조차 없어 보여요. 그의 시선은 앞의 아이들 쪽을 향하지만, 정작 아이들에게 닿지는 않지요. 반면 오른쪽 피라미드는 격렬하게 위로 솟구쳐요. 말에 묶인 채 몸부림치는 여인, 말의 곤두선 갈기, 그 위에서 몸을 비틀며 호령하는 군인이 역동을 만들어 내지요. 그런데 그 발치에서는 한 노파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 곁의 아기는 이미 주먹을 꽉 쥔 시신에게서 어미의 품을 찾으려 하고 있어요. 보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장면이지요.
'회화의 학살'이라는 조롱
이 그림은 1824년 살롱에 450번 전시품으로 걸렸어요. 하필 같은 방에 앵그르의 《루이 13세의 서약》이 함께 걸렸는데, 형식을 다루는 두 화가의 정반대 태도가 한자리에서 부딪치며 두 사람의 오랜 공개적 경쟁이 시작되었지요. 들라크루아는 바로 이 순간부터 아카데미가 자신을 '반감의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고 느꼈답니다.
반응은 격렬했어요. 알렉상드르 뒤마는 '그림 앞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 온갖 유파의 화가들이 열띤 논쟁을 벌인다'고 전했어요. 들라크루아가 구도를 빌려 온 《자파의 페스트 환자들》의 작가 그로는 이 작품을 두고 '회화의 학살'이라 비꼬았고, 앵그르는 '현대 미술의 열병과 간질'을 보여 준다고 깎아내렸어요. 차갑고 단정하던 신고전주의의 질서를 정면으로 깨뜨렸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하지만 호의를 보인 비평가들도 있었고, 국가는 그해 6천 프랑에 이 그림을 사들였어요. 그렇게 낭만주의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이 작품은 지금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답니다.
관람 포인트
먼저 화면 앞줄의 인물들이 두 무리로 나뉜다는 걸 의식하며 보세요. 왼쪽은 붉은 페즈를 쓴 남자까지, 오른쪽은 말 탄 군인까지 — 두 개의 인간 피라미드를 찾아내면 들라크루아의 구도가 한눈에 들어와요. 다음으로 오른쪽 말 발치를 들여다보세요. 하늘을 올려다보는 노파와, 주먹 쥔 시신에게 매달린 아기가 이 그림에서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랍니다. 그리고 앞쪽 인물들의 살빛을 서로 견주어 보세요. 죽어 가는 남자의 강렬한 색감과, 오른쪽 누드의 차분한 명암, 아기의 도식적인 모델링이 일부러 다르게 칠해져 있어요. 마지막으로 인물들 뒤편, 멀리 물러나는 배경으로 눈을 옮겨 보세요. 불타는 마을과 그을린 땅, 원근법마저 흐트러진 구름이 끝없이 열려 나가며 중심 없는 황량함을 자아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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