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està
← 소장품으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Liberty Leading the People

외젠 들라크루아

분류
Paintings
지역
서양
라이선스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작품 소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프랑스어: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영어: Liberty Leading the People)은 외젠 들라크루아가 프랑스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1830년에 그린 그림으로, 1789년에 벌어진 프랑스 혁명을 그려낸 작품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다.

도슨트 이야기

그림 속 여인이 가슴을 드러낸 채 앞으로 걷고 있습니다. 한 손엔 총검 달린 소총을, 다른 손엔 삼색기를 높이 들었어요. 그 뒤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따릅니다. 중절모를 쓴 부르주아 청년, 양 손에 권총을 든 소년, 혁명적 도시 노동자 — 시선이 날카롭고 표정엔 결의가 가득해요.

이 그림이 묘사하는 것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아닙니다. 들라크루아는 1830년 7월 혁명 — 샤를 10세를 왕좌에서 끌어내린 사흘간의 봉기 — 를 그렸어요. 같은 해 10월, 그는 형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쁜 기분이 일에 몰두하며 사라졌어. 바리케이드를 그리기 시작했지. 나라를 위해 싸우지 못했으니 적어도 그림으로는 싸우겠어.' 이듬해 1831년 파리 살롱에서 처음 공개됐을 때, 프랑스 정부는 이 작품을 3,000프랑에 사들였어요.

그러나 그 이후가 흥미롭습니다. 정부는 처음엔 왕궁의 옥좌 방에 걸 생각이었지만 계획을 접었고, 얼마 뒤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공개 전시를 중단했어요. 1832년 6월 봉기가 일어나자 그림은 들라크루아에게 되돌아갔고, 한동안 다락에 숨겨졌습니다. 혁명을 부르는 그림이기에 보수적인 시절엔 감춰져야 했던 거예요.

1848년과 1855년 잠깐 전시됐다가, 제3공화국이 들어선 1874년에야 루브르 컬렉션에 정식 편입됐습니다. 그리고 이 가슴을 드러낸 자유의 여신은 훗날 1프랑 지폐에, 아일랜드 우표에, 콜드플레이 앨범 표지에 새겨졌어요. 때론 혁명 그 자체보다 오래 살아남는 것이 혁명의 이미지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보세요
  • 삼각형 구도깃발을 든 여인을 꼭짓점으로 인물들이 삼각형을 이뤄요. 발치의 주검들이 그 밑변이 되어, 죽음을 딛고 솟는 구조죠.
  • 자유의 알레고리가슴을 드러낸 여인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자유' 그 자체예요. 머리엔 자유를 상징하는 프리기아 모자를 썼죠.
  • 유일한 삼색기화면에서 가장 선명한 빨강·하양·파랑. 매캐한 회색 연기 속에서 깃발 하나가 단번에 시선을 끌어요.
  • 뒤섞인 군중실크해트를 쓴 신사, 셔츠 차림의 노동자, 권총 두 자루를 쥔 소년 — 계층이 뒤섞인 사람들이 함께 전진해요.
  • 멀리 파리오른쪽 연기 너머로 노트르담의 두 탑이 희미하게 보여요. 이 봉기의 무대가 파리임을 일러주죠.

당신의 시선은 깃발에 먼저 닿았나요, 발밑의 주검에 먼저 닿았나요?

도슨트 심화더 깊이 보기 ↓

1789년이 아니라 1830년

많은 분이 이 그림을 프랑스 대혁명(1789)으로 오해하지만, 들라크루아가 그린 건 1830년 7월, 샤를 10세를 끌어내린 '7월 혁명'이에요. 이미 프랑스 낭만주의를 이끌던 그는, 정밀한 소묘를 앞세우던 아카데미 미술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색채에 새 힘을 실었지요. 1830년 가을 이 작품을 그리며 그는 동생에게 이렇게 적었어요. "조국을 위해 싸우진 못했지만, 적어도 조국을 위해 그림은 그리겠다." 작품은 1831년 살롱에 처음 걸렸습니다. 많은 학자가 이 그림을, 계몽주의 시대가 저물고 낭만주의가 열리는 길목을 알리는 작품으로 읽기도 해요.

여신이자 민중인 여인

화면 한가운데, 자유의 알레고리인 여인이 맨발과 맨가슴으로 쓰러진 자들의 더미를 딛고 우리 쪽으로 걸어 나와요. 그녀가 쓴 프리기아 모자는 1789년 혁명 때부터 자유의 상징이었고, 손에 든 삼색기는 이 사건 이후 다시 프랑스의 국기가 되었지요. 들라크루아가 프리기아 모자를 쓴 자유의 여신을 처음 그린 화가는 아니지만, 이 여인은 곧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는 '마리안'의 가장 널리 알려진 모습으로 자리 잡았답니다.

그녀를 따르는 이들은 여러 계층에서 모였어요. 실크해트를 쓴 부르주아, 이각모를 쓴 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 그리고 양손에 권총을 든 도시 노동자 소년까지요. 출신은 달라도 눈빛만은 한결같이 결연하지요. 이 소년은 훗날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속 가브로슈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요. 실크해트를 쓴 남자가 누구인지는 오래 논쟁거리였는데 — 한때 들라크루아 자신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몇몇 인물은 당대 인기 삽화가 샤를레의 판화에서 빌려 온 것으로 보인답니다. 저 멀리 노트르담 탑에도 작은 삼색기가 하나 더 휘날리고 있고요.

너무 혁명적이라 숨겨진 그림

프랑스 정부는 1831년 이 그림을 3,000프랑에 사들였어요. '시민왕' 루이 필리프에게 자신이 어떻게 권좌에 올랐는지 일깨우려는 뜻이었지요. 그런데 메시지가 너무 선동적이라는 이유로 곧 내려졌고, 1832년 봉기 이후로는 다시 공개되지 못한 채 한동안 다락에 숨겨지기까지 했어요. 1848년 2월 혁명과 1855년 제2제정 살롱 때 잠깐씩 모습을 드러냈을 뿐, 그림이 루브르의 영구 소장품이 된 건 한참 뒤인 1874년, 제3공화국에 이르러서예요. 이 여신은 훗날 바르톨디의 '자유의 여신상'에도, 그리고 콜드플레이의 앨범 표지에도 영감을 주며 자유의 보편적 상징으로 살아남았지요.

관람 포인트

2.99×3.62m의 큰 화면 한가운데, 우리를 향해 걸어 나오는 여신의 움직임을 느껴 보세요. 시신 더미가 그녀가 딛고 선 받침대가 되는 구도가 인상적이지요. 2024년 복원 때 여덟 겹의 누런 광택제와 먼지 아래에서 더 밝은 하늘과 흰 연기가 되살아났고, 본래 회색빛이던 옷, 그리고 왼쪽 아래 포석에 묻혀 있던 장화 한 짝까지 다시 드러났답니다. 200년 가까운 세월에 가렸던 색이 되돌아온 셈이지요. 그 선명해진 화면 앞에 서면, 한 시대가 다음 시대로 넘어가던 격동의 순간이 더 생생하게 전해질 거예요.

이 작품이 속한 기획전
관련 용어
다음 이야기
Death of Sardanapalus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외젠 들라크루아

패망을 앞둔 왕이 모든 것을 파괴하라 명하는 광란, 살롱을 충격에 빠뜨린 낭만주의의 과잉.

이어 보기 →
이 작가의 다른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