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 펌프 속의 새 실험
An Experiment on a Bird in the Air P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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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in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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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Experiment on a Bird in the Air Pump is a 1768 oil-on-canvas painting by Joseph Wright of Derby, one of a number of candlelit scenes that Wright painted during the 1760s. The painting departed from convention of the time by depicting a scientific subject in the reverential manner formerly reserved for scenes of historical or religious significance. Wright was intimately involved in depicting the Industrial Revolution and the scientific advances of the Enlightenment. While his paintings were recognized as exceptional by his contemporaries, his provincial status and choice of subjects meant the style was never widely imitated. The picture has been owned by the National Gallery in London since 1863, and is regarded as a masterpiece of British art.
촛불 하나가 방 안 전체를 밝히고 있어요. 그 빛 아래, 유리 용기 안에서 회색 코카티엘 한 마리가 파닥거리고 있고, 자연철학자는 펌프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그림 밖 관람객을 정면으로 바라봐요. 당신이라면 계속 공기를 빼내겠냐고, 조용히 묻는 것처럼요.
조지프 라이트가 1768년에 그린 이 그림은 로버트 보일이 고안한 공기 펌프 실험을 재현한 장면이에요. 밀폐된 용기에서 공기를 제거하면 생물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이 시연은, 당시 부유한 가정과 도시 곳곳에서 인기 있는 구경거리였죠. 한 연구자는 살아 있는 동물 대신 작은 공기 주머니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고 적었어요. '동물을 쓰는 건 조금이라도 인간성이 있는 관람객에게는 너무 충격적'이라는 이유로요.
그런데 라이트는 완충 장치 없이 실제 새를 그려 넣었어요. 그것도 당시 유럽에서 희귀했던 코카티엘로요. 그 선택 덕분에 방 안 사람들의 반응이 제각각으로 갈려요. 왼쪽의 연인은 새에는 아랑곳없이 서로에게만 빠져 있고, 한 소녀는 차마 보지 못하고 아버지 품에 얼굴을 묻었어요. 시계를 들여다보며 실험 시간을 재는 신사도 있고, 오른쪽 구석의 소년은 새장을 올리는 건지 내리는 건지 알 수 없는 동작을 하고 있어요.
탁자 위 액체 가득 찬 유리 그릇 안에는 해골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잠겨 있고, 옆에는 꺼진 촛불이 놓여 있어요. 죽음을 암시하는 상징들이 새의 몸부림과 나란히 놓인 셈이에요. 계몽의 시대에 과학은 경이로움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경이로움에는 늘 이런 불편한 질문이 따라붙었어요.
- 단 하나의 빛 — 탁자 위 둥근 유리그릇 뒤에 가려진 빛 하나가 둘러선 얼굴들만 환히 끌어내고, 나머지 방은 깊은 어둠으로 잠겨요. 그릇 속 어렴풋한 형상이 빛을 머금어 더 붉게 타오르죠.
- 위로 든 손 — 화면 꼭대기, 한 손이 유리병 꼭지를 쥐고 있어요. 이 손이 공기를 마저 빼면 새는 죽고, 멈추면 살아나요. 새의 운명이 저 손끝 하나에 걸린 셈이죠.
- 돌아선 얼굴 — 가운데 두 소녀를 보세요. 한 아이는 걱정스레 새를 올려다보고, 다른 아이는 차마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묻었어요. 그 곁 어른이 가만히 손으로 위로하죠.
- 당신을 보는 눈 — 흰 머리의 과학자만은 새도 사람도 아닌 그림 밖, 바로 당신을 응시해요. 계속할지 멈출지, 그 판단을 우리에게 떠넘기는 듯한 시선이죠.
- 오른쪽 창밖 — 어둠 속 유일하게 트인 오른편 창으로 구름 사이 보름달이 떠 있어요. 빛에 휩싸인 실내와 달리, 저곳만은 서늘하고 푸른 밤이죠.
저 위로 든 손은 지금 공기를 빼는 중일까요, 아니면 막 멈추려는 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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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종교화의 자리에 앉던 순간
조지프 라이트는 영국 중부의 더비라는 지방 도시에서 평생을 보낸 화가예요. 런던 화단의 중심에서 비켜나 있었지만, 그는 바로 그 지방에서 꽃피던 산업혁명과 계몽주의의 열기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었지요. 라이트는 증기와 톱니바퀴, 실험 도구가 만들어 내던 새로운 경이가, 옛 화가들이 성경 장면에서 그려 내던 경외감 못지않다고 믿었답니다.
그래서 1768년에 완성한 이 큰 그림에서 그는 과감한 일을 해냈어요. 본래 역사화나 종교화에만 허락되던 엄숙하고 경건한 화법을, 한낱 과학 실험 장면에 그대로 끌어다 쓴 것이지요. 당대의 비평가들은 그를 '아주 위대하고 보기 드문, 독특한 천재'라 불렀지만, 지방 출신이라는 처지와 별난 소재 탓에 그의 양식을 따라 그리는 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이 작품은 오늘날 영국 미술의 손꼽히는 걸작으로 남아 있답니다.
단 하나의 빛이 빚어낸 명암
이 그림의 가장 강렬한 힘은 빛에서 나와요. 화면 한가운데, 탁자 위 둥근 유리 그릇 뒤에 가려진 단 하나의 광원이 모든 인물을 비추고 나머지는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지요. 어찌나 눈부신지 그 빛이 화면을 압도하지요. 라이트는 1760년대 내내 이런 촛불 야경을 연이어 그렸는데, 이 작품은 그 정점에 해당해요.
사실 조각상을 촛불로 감상하거나, 천체 모형으로 일식을 시연할 때는 어두운 조명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그런데 공기 펌프 실험만큼은 굳이 촛불 하나만 켜 둘 까닭이 없었지요. 라이트는 오로지 극적인 효과를 위해 어둠을 택한 거예요. 그릇 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해골 같은 형상은 곁의 촛불과 함께, 생명의 덧없음을 일깨우는 '바니타스'로 읽히기도 해요.
새 한 마리를 둘러싼 마음의 풍경
유리병 속에서 푸드덕거리는 새는 회색 코카투앵무인데, 당시로서는 무척 귀한 새였어요. 실제 실험에서는 이렇게 값진 새의 목숨을 거는 일이 결코 없었지요. 떠돌이 강연자들은 흔히 살아 있는 짐승 대신 작은 공기주머니를 넣은 '허파 유리'를 썼는데, 산 생명을 쓰는 건 '인정이 조금이라도 있는 관객에게는 너무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라이트가 굳이 진귀한 새를 택한 것은, 계몽시대 사회의 가치를 되묻는 몸짓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둘러선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에요. 두 신사와 소년은 호기심에 차서 들여다보고, 왼편의 젊은 연인은 서로에게만 빠져 있어요. 한 소녀는 걱정스레 새를 지켜보고, 다른 소녀는 차마 보지 못해 아버지의 위로를 받지요. 흥미롭게도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새를 향한 연민이 짙어진답니다. 중앙의 과학자는 정작 우리 쪽을 똑바로 바라봐요. 펌프질을 계속해 새를 죽일지, 멈춰 공기를 되돌려 살릴지, 마치 그 판단을 우리에게 떠넘기듯 말이지요.
관람 포인트
먼저 중앙 과학자의 시선을 따라가 보세요. 그는 그림 밖, 바로 당신을 응시하며 결정을 묻고 있어요. 다음으로 오른쪽 뒤편, 새장을 줄에 매달고 있는 소년을 찾아보세요. 그가 새장을 내리는 것인지 도로 올리는 것인지, 라이트는 끝내 알려 주지 않아요. 새의 운명이 그 손에 걸려 있는 셈이지요. 탁자 위 온도계와 촛불 끄개, 그리고 진공의 힘을 보여 주던 마그데부르크 반구도 놓치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창밖의 보름달을 올려다보세요. 달빛 아래 모이던 루나 협회 모임에 보내는, 화가의 조용한 인사랍니다.

촛불 하나로 태양계를 밝힌 밤, 과학이 종교를 닮은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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